쉬는 날인데도 괜히 불안한 적 있으십니까. 저는 그랬습니다. 달력에 빨간 날이 찍혀 있어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하고 하루를 흘려보낸 날이 꽤 많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접한 일본 영화 한 편이 제가 쉬는 방식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영화가 바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2007년작 〈안경〉입니다.슬로우시네마가 주는 힐링의 정체〈안경〉은 이른바 슬로우시네마(Slow Cinema) 장르에 속합니다. 슬로우시네마란 사건 전개나 갈등 구조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일상의 속도 그대로를 화면에 담아내는 영화적 방법론을 말합니다. 극적인 반전도 없고 복잡한 인물 관계도 없습니다. 그냥 밥을 먹고, 바닷바람을 맞고, 빙수를 혀로 녹이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처음 이 영화를 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오히려 말을 못 꺼낸 적 있으신가요. 저도 한동안 아버지와 그랬습니다. 뭘 말해야 할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그냥 시간을 흘려보낸 기억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들리나요'를 보면서 그 시절이 떠올랐고, 결국 소통이라는 게 전문 지식보다 용기의 문제라는 걸 다시 실감했습니다.소통 전문가에게도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었다연간 7천 회가 넘는 강연을 해온 김창옥 교수님을 처음 접한 건 아버지의 추천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고 울림 있다는 소문대로, 강의를 듣고 나면 뭔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들리나요'에서 지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교수님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무대 위에서 청중과 거침없이 교감하던 그 사람이 정작 가장 가까운 아버지와는 수십 년째 제대로 ..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키보드 리프, 들은 순간 "아 이 노래" 하고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멜로디가 있습니다. 저도 처음 Take On Me를 접했을 때 당연히 예전부터 유명한 노래니까 그냥 인기 있는 팝송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밴드의 역사를 파고들수록, 이 노래 하나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와 고집이 쌓였는지 알게 됐고, 그 이후로 A-ha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차트 광탈에서 빌보드 1위까지, A-ha의 험난한 데뷔노르웨이 출신 기타리스트 폴 왁타르-사바이와 키보드 연주자 마그네 푸루홀멘은 원래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에 깊이 빠져 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사이키델릭 록이란 1960~70년대에 유행한 장르로, 복잡한 음향 실험과 몽환적 분위기를 특..
솔직히 저는 그를 그냥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쯤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릴 적 봤던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재미있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니, 제가 20여 년 동안 그의 작품을 표면만 훑었다는 게 부끄러워졌습니다. 재미있는 애니메이션 뒤에 이 정도의 문제의식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전쟁과 물질문명이 빚어낸 문제의식 미야자키 하야오는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해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고, 어린 시절 그의 가장 오래된 기억 중 하나는 폭격 소리입니다. 가족이 도쿄를 떠나 이주한 우쓰노미야 지역에도 대규모 공습이 있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도 그가 네 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이 전쟁 체험이 그의 창작 세계..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일본 영화라면 으레 조용하고 감정을 아끼는 작품이겠거니 했는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은 그 잔잔한 표면 아래 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세 편의 에피소드 모두 우연히 맞닥뜨린 상황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상상을 따라가다 보면, 인연이라는 것이 결국 얼마나 얇은 실 위에 걸쳐 있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베를린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그 배경과 맥락이 영화는 제7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심사위원 대상(Silver Bear Grand Jury Prize)이란 베를린 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곰상 바로 아래에 해당하는 권위 있는 상으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영화 중 심사위원단의 특별한 지지를 받은 작품에게 수여됩니다. 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영화 중간에 흘러나왔을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뻔한 적이 있습니다. 폴킴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서 딱 그런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버텼던 시절이 있었는데, 화면 속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때의 저 자신이 겹쳐 보였습니다. 가엾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불안했던 20대가 만들어낸 서정성폴킴은 데뷔 전 불안했던 20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 시절의 감정들이 지금의 음악적 토양이 됐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고개를 끄덕이게 됐습니다. 보통 뮤지션들은 자신이 "어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장르나 방향을 먼저 이야기하는데, 폴킴은 그냥 "음악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 단순한 말이 오히려 더 묵직하게 들렸습니다.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