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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오히려 말을 못 꺼낸 적 있으신가요. 저도 한동안 아버지와 그랬습니다. 뭘 말해야 할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그냥 시간을 흘려보낸 기억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들리나요'를 보면서 그 시절이 떠올랐고, 결국 소통이라는 게 전문 지식보다 용기의 문제라는 걸 다시 실감했습니다.

    김창옥

    소통 전문가에게도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었다

    연간 7천 회가 넘는 강연을 해온 김창옥 교수님을 처음 접한 건 아버지의 추천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고 울림 있다는 소문대로, 강의를 듣고 나면 뭔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들리나요'에서 지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교수님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무대 위에서 청중과 거침없이 교감하던 그 사람이 정작 가장 가까운 아버지와는 수십 년째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Persona)의 분리라고 부릅니다. 페르소나란 사회적으로 보여주는 자아, 즉 타인 앞에서 의식적으로 연출하는 나의 모습을 뜻합니다. 강단 위의 김창옥과 가족 앞의 김창옥이 이렇게 달랐던 건, 그 간극이 컸기 때문일 겁니다. 저도 솔직히 이 부분에서 꽤 찔렸습니다. 저 역시 밖에서는 말 잘 한다는 소릴 듣는데, 아버지 앞에선 왜 그렇게 작아졌는지 모르겠으니까요.

    교수님의 아버지는 3급 청각장애를 오래 지닌 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안엔 늘 긴장이 흘렀고, 그 분위기가 교수님에게 깊이 각인됐습니다. 상처는 단순히 기억으로 남는 게 아니라 몸과 행동 방식에 배어드는 법이고, 교수님은 그걸 강연이라는 방식으로 풀어왔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강연을 통해 남에게 위로를 건넸지만, 정작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소통은 오랫동안 보류 상태였던 겁니다.

    인공와우 수술, 단순한 의료 행위가 아니었다

    교수님이 영화를 통해 하려던 일은 아버지께 인공와우(Cochlear Implant) 수술을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공와우란 달팽이관(와우)이 손상된 고도 난청 환자에게 전극을 삽입해 청신경을 직접 자극하는 방식으로 소리를 전달하는 의료기기입니다. 보청기로 효과를 보기 어려운 경우에 시도하는 방식으로, 수술 후 재활 훈련이 동반되어야 실질적인 청취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70년 가까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던 분에게 이 수술이 얼마나 의미 있을지 생각해보면, 단순한 의료 행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실제로 국내 인공와우 수술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고령 환자에게도 일정 기준을 충족할 경우 시행이 가능합니다(출처: 국민건강보험공단). 교수님은 그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검사를 받으러 갔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아버지 이야기보다 교수님 자신의 이야기가 더 많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점이 저에게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정작 드러난 건 자신의 내면이었던 거죠. 아버지의 귀를 열어주려다 자기 자신의 문이 먼저 열린 셈입니다. 이게 트라우마 치유 과정에서 자주 나타나는 패턴이기도 합니다. 트라우마(Trauma)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 경험이 심리적으로 고착되어 이후의 관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교수님에게 아버지와의 관계는 바로 그런 트라우마의 진원지였던 겁니다.

    강연에서 못 했던 말, 카메라 앞에서 나왔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건 교수님의 측근들과의 인터뷰 장면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평소 알던 김창옥과 꽤 다른 사람이 보입니다. "강연은 재미있는데 눈이 슬프다"는 말을 누군가가 했을 때 교수님이 당황했다는 대목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저도 직접 강의를 보면서 비슷한 걸 느끼긴 했는데, 그게 단순한 인상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 과정은 심리 치료에서 말하는 자기 개방(Self-Disclosure)의 흐름과 닮아 있습니다. 자기 개방이란 자신이 의식적으로 통제해왔던 내면의 이야기를 타인 앞에 꺼내놓는 행위를 말합니다. 강연에선 준비된 이야기를 하지만, 영화에선 몸을 그냥 맡길 수밖에 없었다고 교수님이 직접 밝혔습니다. 그 솔직함이 이 영화를 단순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치유의 기록으로 만든 것 같았습니다.

    교수님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면 그의 강연 방식도 달리 보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이 취하는 생존 전략 중 하나가 '남을 먼저 돌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보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집중하는 방식이죠. 이를 심리학에서는 돌봄 강박(Compulsive Caregiving)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루에 두 번씩 강연을 다니며 극도로 소진된 상태였음에도 멈추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트라우마연구교육원에 따르면 어린 시절 가정 내 불안정한 애착 경험은 성인이 된 이후의 대인 관계 패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출처: 한국트라우마연구교육원). 교수님 이야기가 특별한 게 아니라,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크고 작은 방식으로 이 패턴 안에 있다는 게 솔직한 생각입니다.

    아버지의 전화 한 통이 바꾼 것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가 수술 후 교수님에게 전화를 겁니다. "막둥아, 아빠야." 짧은 말이지만, 이 한 마디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70년 가까이 잘 들리지 않던 귀로 아들 목소리를 듣고,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그 장면에서 저는 돌아가신 제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저도 한때 아버지와 서먹하고 어려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아버지도 처음 아버지가 된 사람이었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끌어안은 채 최선을 다해 우리를 키운 분이었습니다. 술로 힘든 마음을 삭히면서도 우리에게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 했던 그 모습이, 돌아가신 후에야 얼마나 소중한 기억인지 알게 됐습니다.

    이 영화가 가진 힘은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가족 간 소통에서 막혀 있는 분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상황을 투영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막힌 부분을 풀기 위해 필요한 게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먼저 손을 내미는 작은 용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핵심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소통 전문가라도 자기 자신, 가족과의 소통은 별개의 숙제다
    • 어린 시절 트라우마는 성인이 된 이후의 관계 방식에 깊이 영향을 준다
    • 상대를 위한 행동이 결국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 먼저 손을 내미는 작은 용기가 수십 년의 거리를 좁힌다

    영화를 보다가 웃고, 또 울고, 어느 순간 멍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단순히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어딘가 어색함이 남아 있다면, 지금 당장 완벽한 화해를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짧은 안부 문자 하나, 밥 한 끼 먼저 제안하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한 시작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연락을 못 했던 분께 먼저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따뜻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남에게 친절하듯 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가까운 사람에게도 그 용기를 한번 내보시길 권합니다.

    영화 들리나요 포스터


    참고: https://youtu.be/IrUET0Jwd7I?si=CxzAYth4JKklBe3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