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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청춘 로맨스인 줄 알고 극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말문이 막혀버린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도 딱 그랬습니다. 일본 영화 포스터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어서 "아, 이제 개봉했구나" 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판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작품이었죠. 예상보다 훨씬 묵직한 여운을 남긴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두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사랑을 기록하는 소녀 —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는 설정
이 영화의 핵심 장치는 여주인공 서연이 앓고 있는 선행성 기억상실증(Anterograde Amnesia)입니다. 여기서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과거의 기억은 온전히 남아 있지만 새로운 사건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잠들기 전까지는 멀쩡하다가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어제 하루가 통째로 지워져 버리는 것이죠.
서연은 2025년 교통사고로 이 병을 얻었고, 이후 자기 전 그날 있었던 일을 일기에 빼곡히 적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일기와 방 안 가득 붙은 메모지를 통해 '어제의 나'를 다시 주입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판타지적 설정이 아니라 실제 신경과학에 기반한 병명이라는 점이 오히려 더 묵직하게 다가왔거든요.
이 병명은 실제로 뇌의 해마(Hippocampus) 손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해마란 새로운 정보를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뇌 부위입니다(출처: 한국신경과학회).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서연이 아침마다 기억을 '주입'하는 루틴이 단순한 영화적 장치가 아니라 실제 환자들이 겪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 선행성 기억상실증: 새로운 기억 형성이 불가능한 상태. 과거 기억은 유지됨
- 해마 손상이 주요 원인 — 교통사고, 뇌졸중, 심한 스트레스 등이 유발 가능
- 서연의 대응 전략: 일기 + 메모 + 매일 아침의 '기억 주입' 루틴
- 기억이 사라져도 몸과 감정이 먼저 기억하는 '절차적 기억(Procedural Memory)'의 가능성을 영화는 암시함

청춘 로맨스의 조건 — 두 사람이 서로를 기억하는 방식
남주인공 김재원은 처음엔 짝꿍을 괴롭히는 무리와 협상하기 위해 서연에게 감정도 담지 않은 고백을 합니다. 근데 서연이 "그래, 사귀자"라고 답한 순간부터 둘의 관계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죠. 사실 이 장면, 저도 처음엔 좀 억지스럽지 않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어색한 시작이 오히려 두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자라났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였다는 걸 알게 됩니다.
서연이 제시한 연애의 조건은 세 가지였습니다. 학교 안에서는 아는 척하지 않기, 연락은 짧게 하기, 그리고 정말로 깊이 좋아하지 않기. 이 조건들이 얼핏 보면 차갑고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실상은 기억이 매일 리셋되는 자신을 위한 자기보호 장치였습니다. 기억을 잃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깊이 의존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서연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거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조건을 하나씩 무너뜨려 나갑니다. 재원은 서연의 일기장 속 기록으로만 살아있었지만, 동시에 서연의 몸이 재원을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절차적 기억(Procedural Memory)의 영역으로,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몸과 감정이 먼저 반응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서연이 스케치북에 낯선 남자의 얼굴을 자꾸 그리게 되는 장면은 그 절차적 기억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연출 방식이 대사보다 훨씬 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반면 재원은 나중에 자신의 심장 질환(선천성 심장병) 때문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연 곁에 있기를 선택합니다. 심장 질환이란 심장의 구조나 기능에 문제가 생겨 정상적인 혈액 순환이 어려워지는 상태로, 선천성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영화는 재원의 병을 크게 드라마틱하게 다루지 않는데, 오히려 그 담담함이 더 아팠습니다.
건강과 시간의 유한성 — 이 영화가 저에게 남긴 진짜 질문
재원이 죽기 전 서연의 친구 지민에게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일기장에서 자신에 관한 기록을 모두 지워달라는 것. 서연이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 마음이었겠죠. 이 장면에서 저는 생각보다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우겠다는 선택, 그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도 따뜻한 것인지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저 역시 건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솔직히 저는 몸이 큰 탈 없이 돌아간다는 이유로 시간을 너무 쉽게 흘려보낸 편입니다.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주변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걸 '나중에'로 미루는 것도 그중 하나였죠. 근데 재원처럼 시간이 유한하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다면, 과연 오늘 하루를 이렇게 보낼 수 있었을까요.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선천성 심장 질환은 전 세계 신생아 1000명 중 약 8~10명에게 발생하며, 조기 진단과 꾸준한 관리가 예후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출처: WHO). 영화 속 재원의 이야기가 단지 픽션이 아닌, 누군가의 실제 현실일 수 있다는 사실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에 남았습니다.
저는 주위에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는 처음엔 실감이 안 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 빈자리가 느껴지더라고요. 그 이후로 그 사람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 하나하나가 전과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어쩌면 서연이 무의식 속에서 재원의 얼굴을 그렸던 것도 그런 감각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억은 사라져도, 그 사람이 남긴 온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자주 묻는 질문
Q. 이 영화 원작이 일본 소설이라고 하던데, 한국판은 많이 다른가요?
A. 원작은 이치조 미사키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일본 영화입니다. 한국판은 원작의 핵심 설정인 기억을 잃는 소녀와 그 곁을 지키는 소년이라는 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두 인물의 감정선에 더욱 집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특유의 학교 문화와 청춘 감성이 덧입혀진 느낌이라, 원작 팬이라도 충분히 새로운 감동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원작과 비교해서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Q. 선행성 기억상실증이 실제로 있는 병인가요?
A. 네, 실제로 존재하는 신경과적 질환입니다. 뇌의 해마 부위 손상으로 인해 새로운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흔히 영화적 설정으로만 알고 있는 분들도 있는데, 사고나 뇌손상 이후 실제로 나타나는 사례가 보고되어 있습니다. 다만 영화에서처럼 딱 하루 단위로 기억이 리셋되는 방식은 극적으로 단순화된 것이고, 실제 증상은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Q. 결말이 해피엔딩인가요? 슬픈 영화인가요?
A. 해피엔딩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단순히 슬픈 영화라고 말하기도 모자란 작품입니다. 남주인공 재원은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지만, 서연은 결국 그와의 흔적을 온전히 돌려받고 그를 기억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저는 이걸 비극적 해피엔딩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눈물이 나면서도 마음속 어딘가가 따뜻해지는, 그런 여운이 있는 결말입니다.
Q. 주연 배우들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A. 남주인공 김재원 역은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로 확실하게 얼굴 도장을 찍은 배우 추영우가 맡았고, 스크린 데뷔작입니다. 여주인공 서연 역은 드라마 언젠간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에 출연한 신시아가 맡았습니다. 두 배우 모두 원작 소설의 팬이었다고 알려져 있어서인지, 서로에 대한 감정선을 상당히 자연스럽고 풋풋하게 담아냈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도 연기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결론
잔잔한 영화를 기대하고 갔는데, 제가 얻어온 건 자기반성이었습니다. 재원은 심장 질환이라는 시한부 현실 속에서도 서연 곁에 머물기를 선택했고, 서연은 기억이 매일 사라지는 조건 속에서도 오늘 하루를 기록하고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완전하지 않은 몸으로, 완전하지 않은 시간 속에서 최선을 다해 서로를 대했습니다.
그걸 보고 나서 저는 '건강한 몸으로 아무 문제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 자체가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인연이란 잠깐 스쳐도 마음 깊숙이 새겨지는 것이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그 인연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삶을 밝혀가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 원작이 궁금하신 분도, 한국 청춘 로맨스가 좋으신 분도, 한 번씩 보시기를 권합니다.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을 것입니다.
2025년 청룡 영화상 신인 감독상을 수상한 김혜영 감독의 연출 방식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감정을 과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조용하고 섬세하게 쌓아 올리는 방식이 이 이야기와 아주 잘 맞았습니다.